중국 유명 경극인 귀비취주(貴妃醉酒)에는 양귀비가 연인인 당 현종을 기다리며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다. 기다리던 현종이 오지 않자 환관에게 현종이 서궁의 강비 처소에 들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술을 마시다 이내 취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양귀비가 마신 술이 바로 중국 섬서성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전통 백주인 ‘서봉주(西鳳酒)’다.
지난 17일 이 백주가 만들어지는 중국 섬서(陕西)성 바오지(宝鸡)를 찾았다. 가장 가까운 공항인 시안 셴양(咸阳) 국제공항에서 차로 172㎞, 2시간을 넘게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중국 서북지역에서 가장 큰 국가 명주 제조업체인 이 곳은 195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지시로 만들어졌으며, 약 52만평(173만4200㎡)의 공장 면적이 중국 대형 1급 국가 기업에 걸맞는 위용을 풍겼다.
◇ 누룩향 가득한 공장서 원액만 연간 10만t 생산
버스에서 내려 공장 내부에 발을 딛자 간장을 끓이는 듯한 쿰쿰한 향이 공장 안에 가득했다. 서봉주는 백주를 만드는 전통 방식 중 하나인 고태발효법(固態發酵法)으로 술을 빚기에 곡물로 만든 누룩을 사용하는데, 누룩이 발효 과정에서 뿜어내는 향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로 된 곡물 저장 탱크를 지나 증류 작업장 앞에 도착하자 묵은 고추장에서 나는 것 같은 매운 향, 된장에서 나는 구수한 향 등과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근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장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스테인리스로 만든 솥이 증기를 마구 뿜어대고 있는 ‘증류 구역’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장 상단에 설치된 크레인이 앞뒤로 움직이면서 발효가 끝난 원료를 담아 증류 지역에 쏟아 넣고 있었고, 빨간 안전모를 쓴 6명의 작업자가 크레인이 원료를 담을 수 있도록 삽으로 원료를 모으면서 증류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작업장 뒤편으로는 네모난 모양으로 작업장 바닥을 나눠둔 모습이 보였는데, 주원료인 수수와 누룩을 발효하기 위한 ‘교지(窖池·황토에 물을 섞어 만드는 발효 구덩이)’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서봉주는 이 지역에서 나는 황토로 교지를 만들며, 수수 생곡을 30일 발효한 뒤 증류에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 공장에선 연간 10만톤(t)의 원액이 생산된다.
◇ 국가급 문화재인 싸리나무 옹기 ‘주해’ 숙성이 핵심
생산된 원액은 서봉주의 핵심 설비인 주해(酒海)에서 장기간 숙성을 거친다. 주해는 서봉주 만의 독특한 숙성 옹기로 서봉주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주해는 1400년 전 유적에서 발굴됐는데, 서봉주는 이를 활용해 1400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해 제작은 싸리나무를 수작업으로 엮어 항아리 모양을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이후 내벽에 두부를 발라 틈새를 메운 뒤 면포에 찹쌀풀과 계란 흰자, 동물의 피를 발라 벽면에 붙인다. 이 작업을 100번 이상 반복한 뒤 옹기 겉면에 유채 기름을 두르면 주해가 완성된다.
복잡한 작업 과정도 과정이지만, 주해는 하나에 최대 8t의 술을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주해 옹기 하나를 만드는 데는 1년가량이 걸린다. 서봉주에 따르면 주해에 물을 담으면 밖으로 다 새는데 술을 담으면 한 방울도 새지 않는다고 한다.
서봉주 공장에는 수천개의 주해가 있지만 공장 한쪽에는 오래된 주해를 모아두는 숙성고 3동이 있었다. 한 동에 36개의 주해가 보관된 숙성고에는 1957년부터 숙성을 시작한 주해부터 시진핑 중국 주석의 부친인 시중쉰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의 휘호가 붙은 주해도 볼 수 있었다.
주해들 가운데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었는데, 2017년 9월 국가급 문화재로 인정받은 12개 주해 중 일부였다. 서봉주의 주해 숙성은 전통성을 인정받아 2021년 6월 양조 기술 자체가 다섯 번째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펑야팡 섬서서봉주주식회사 총 공정사는 “봉향(鳯香)형인 서봉주에는 다른 형태의 백주가 갖고 있는 향들이 모두 있다”면서 “하지만 서봉주가 갖는 진향(陳香)은 주해 숙성으로만 만들어진다”고 했다.
서봉주는 짧게는 3년 길게는 수십년 간 주해 숙성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진향은 전복의 즙과 같이 부드럽고 여운이 오래 남는 향이라고 펑 공정사는 설명했다.
◇ 자체 개발한 수수 품종부터 누룩 재료까지 차별화
서봉주는 원료와 누룩에도 다른 백주와 차별점을 갖고 있다. 먼저 자체 개발한 품종인 전분 함량이 높은 ‘홍전(紅澱) 수수’를 주원료로 사용한다. 펑 공정사는 “서봉주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수수만 연간 15만t”이라면서 “원료의 재배부터 선별까지 까다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누룩 역시 밀을 사용하는 많은 양조장과 달리 밀과 보리, 완두콩을 함께 사용해 만든다. 또 발효 온도 역시 ‘중고온’인 섭씨 58도에서 이뤄진다. 펑 공정사는 “섭씨 58도가 봉향을 만들어내기 가장 좋은 온도”라며 “섭씨 60도 이상에서 발효하는 다른 양조장과 달리 온도 유지가 까다롭지만, 최고의 결과를 위해 이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서봉주는 1952년에 열린 제1회 전국 주류 품평회의 수상작 4개 중 하나로 봉향의 대표적인 제품으로 꼽힌다. 4대 명주에는 서봉주를 비롯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장향(醬香)형인 마오타이주(茅台酒)와 청향(清香)형인 펀주(汾酒), 농향(濃香)형인 노주노교(瀘州老) 등이 있다.
◇ 알코올 도수 52도에도 부드러운 넘김… 연 매출 1.5兆
이렇게 만들어진 서봉주는 알코올 도수 45도에서 55도 사이의 제품으로 만들어져 판매된다. 이날 시음잔에 담긴 제품은 서봉주의 가장 최고급 제품인 레드 프리미엄으로 알코올 도수가 52도에 이른다. 독주(毒酒)라고 불릴 수 있을 법한 도수임에도 오랜 숙성을 거쳐서인지 부드럽게 넘어갔다.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지면서 과일의 달콤한 향과 고소한 아몬드 향 등이 느껴졌다. 끝에서는 발효된 곡물의 향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왕성철 한국총주방장협회 회장은 “서봉주는 다른 어느 백주보다도 더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느낌과 고유한 감칠맛이 특징”이라면서 “백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향과 맛을 가졌다”고 했다. 또 “육류·해산물을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리지만 동파육과 같은 돼지고기 요리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서봉주는 1910년 남양권업경진대회에서도 대상을 받았고, 1915년 파나마 박람회에서도 품질부문에서 금상에 이름을 올렸다. 또 1992년 파리국제식품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중화노자호(中华老字号) 브랜드 칭호를 받았다.
산시서봉주그룹주식회사는 서봉주의 품질에 힘입어 높은 매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5% 증가한 84억위안(약 1조558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2021년에는 전년 대비 33% 증가한 80억위안(약 1조483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우리나라에는 2021년부터 화강주류를 통해 수입되고 있는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섬서성의 한국 백주 수출액의 대부분이 서봉주가 차지한다. 섬서성의 한국 백주 수출액은 2021년 17만달러(약 2억원)를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22만6750달러(약 3억원)를 기록했다.
서봉주그룹은 향후 3년 내로 한국 시장 규모를 10배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화강주류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국내 마케팅 활동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람수 화강주류 대표는 “기업들을 상대로 한 마케팅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 서봉주가 차지하는 시장 규모를 키워갈 것”이라며 “결과적으로는 국내 시장에 서봉주를 알려 한국의 술 문화가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